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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rn/독서

[리뷰]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by 심토리지 2024.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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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의 첫 책이었던 공지영 작가님의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이 책은 공지영 작가가 3년만에 내놓은 산문집이다. 요르단 암만을 시작으로 나사렛, 베들레헴,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그 여정 속에서 만난 깨달음과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이 책은, 한달 살기를 위해 출국하던 날 공항에서 구매하게 되었다. 원래 읽고 싶었던 책이 입고되지 않아 돌아서려던 차에 제목에 이끌려 집어 들었던 것 같다. 지난 해 말부터, 한참 번아웃을 겪으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외출에도 흥미가 떨어져 스스로를 가둔 채, 지내고 있었다. 평화롭지만 루즈한 나날들에 익숙해질 때 쯤, 불현듯이 떠나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치앙마이로 한달 살기를 떠나던 날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어쩌면  운명이었을까. 공지영 작가도 번아웃에 시달리면서 고독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고, 그것에서 행복과 평화를 되찾아가던 중 예루살렘으로 불현듯 떠나 이 책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여행을 하는 내내 책 속의 문장들을 수집하며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위로를 얻었다. 다사다난한 2024년을 보내며 다시 한 번 위로가 필요한 시점에, 이 책을 펼쳐들었다. 책 속의 문장들을 곱씹어 보고 픈 마음에 리뷰로 남겨 본다. 이 포스팅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위로와 평화의 시간이 되기를.

 


 

“나는 좀 고요하고 싶어.”
이 질문과 대답은 화두처럼 내게 남았다. 내게 있어서 혼자란 것이 자유라고 서서히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통과 외로움 혹은 결핍 대신.
 
 
그때 나는 알았다. 새것이 오기 전에 옛것을 반드시 버려야 하는 때가 있는데 이 버리는 데도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만두고 포기하는 것, 멀리 보내고 이별을 해내는 것도 힘이 있어서라는 것을. 그것이 사람이든 사랑이든 물건이든 제가 이루어낸 과거의 꽃 같은 영화로움이든.
 
 
전지전능하다면서 나쁜 놈들에게 벼락도 내리지 않기에 나는 무력한 신이 답답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삼갈 일이 많다는 거구나. 아기를 재운 엄마가 아무리 나쁜 놈이 와도 큰 소리로 싸우기를 주저하듯이, 함부로 움직이지도 소리 내지도 못하는 거구나. 그래서 악은 일견 시원해 보이고 사이다 같고 힘이 세 보 이는 거였다. 거칠게 없지 않나. 누가 다치든 상처 입든 상관이 없을 테니. 그래서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삼가야 할 일이 많고 헤아려줄 일이 많고 그래서 많이 약해 보이는 것이었구나.
 
 
그저 어제처럼 사는 것, 내게 젊은이들보다 알량한 권력이 약간 있어, 어제처럼 살아도 나는 불편하지 않고 나만 불편하지 않은 것, 이것이 늙음이다. 죽음보다 못한 늙음을 우리는 흔하게도 본다.
 
 
젊은 시절에 비하면 너무나 현명해지고 너무나 너그러워지고 너무나 침착해졌다고 너희가 칭찬해 주니 그게 참 기뻐. 그런데 이렇게 된 건 나이가 내게 준 것이 결코 아니야. 나이를 먹고 가만히 있으면 그저 퇴보할 뿐이야. 더 딱딱해지고 더 완고해지고 더 편협해지지. 자기가 바보가 된 줄도 모르는 바보가 되지.
만일 내게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면이 있다면 그건 성숙해지고자, 더 나아지고자 흘린 피눈물이 내게 준 거야 쪽팔리고 속상했지만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때 피눈물이 흐르는 거 같았거든.”
 
 
‘할머니는 불운을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이 뜻밖의 친절이라고 했다.
그것만이 삶이 구렁텅이에 빠질 때 우리가 무너질 거라고 믿는 악마를 혼란스럽게 할 거라고.’
이 구절을 읽다가 나는 한참을 더 들여다보았다. 뜻밖의 친절, 할머니는 그것이 베푸는 친절인지 받는 친절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아시다시피 받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걸 주는 일일 뿐일 것이다. 어쩌면 그건 배고픈 이의 고달픈 삶의 길에서 반짝이는 작은 은화 같은 것 이었으리라. 그것이 받는 것이든 주는 것이든. 또한 내가 그것을 남에게 주면 삶의 구렁텅이에 빠진 한 사람을 구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인간은 이상하게도 남이 나로 인해 행복해지면 덩달아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니던가.
 
 
약간 깨달은 것 가지고는 삶은 바뀌지 않는다. 대게는 약간 더 괴로워질 뿐이다. 삶은 존재를 쪼개는 듯한 고통 끝에서야 바뀐다. 결국 이렇게, 이러다 죽는구나 하는 고통 말이다. 변화는 그렇게나 어렵다. 가끔은 존재를 찐는 듯한 고통을 겪고도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대신 고통을 거부하려고 헛되이 싸우던 그가 망가지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그러므로 고통이 오면 우리는 이 고통이 내게 원하는 바를 묻고, 반드시 변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틀이 이제 작아지고 맞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줄 알았었다. 그것이 예의라고 굳게 믿고 살았던 얼치기 모범생이던 나는 그래서 수많은 유혹에 넘어갔다. 세일즈맨의 교과서에도 나온다는 말은 이런 것이라고 한다. 질문을 던져서 고객이 한 번 대꾸하면 50퍼센트, 두 번 대꾸하면 75퍼센트, 세 번 대꾸하면 물건을 팔 확률이 98퍼센트로 높아진다고. 그런데 내 인생의 위험한 고비마다 나는 세 번이 아니라 다섯 번씩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나에게 결여된 것은 침묵. 침묵이 가져올 여백을 감당하는 여유였다.
 
 
침묵, 그래서 우리를 앞서간 수많은 선지자와 현자 들은 사막으로 숲으로 그리고 외딴곳으로 간 것일까. 무엇보다 침묵을 위해서, 낙원 회복의 첫 관문은 어쩌면 침묵이니까?
 
 
한센병이 깊어지면 그게 피부병의 일종이니까 자연히 손과 발 혹은 피부가 뭉그러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센병 균이 우리 몸에 하는 일은 고통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고통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 대게 이런 것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이 없어지고 나면 인간의 손과 발이 뭉개지고 코가 뭉개지며 종국에는 눈도 먼다. 조금도 주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닫다가 손을 찧어도 발 위로 무거운 돌이 떨어져도 피하지 않는다.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눈은 왜 멀게 되나면, 눈을 계속 뜨고 있어도 아프지 않기 때문에 깜박이지 않게 되고 깜박이지 않으니까 심한 안구건조증이 오고, 그리하여 각막이 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센병 환자들에게 몇 초마다 작은 소리를 내는 장치를 주어 그때마다 눈을 깜빡이게 하면 실명이 방지된다고 했다.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참으로 중대하고 두려운 일이다.
 
 
밤은 어둡고 무서운, 나쁜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잠도 자기 싫어했다. 1년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은 하지고, 그 다음은 동지였다. 하지는 낮이 제일 기니까 좋았고 동지는 이제 더 이상은 나빠질 일 없이 낮이 조금씩 길어지겠지 싶어서 그랬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니 치유도 언제나 밤에 일어났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말하곤 했었다.
“자라, 자고 나면 나아 있을 거야.”            
자고 일어나면 신기하게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내 바지가 껑충해지고 옷소매가 짧아져 있기도 했다. 비단 인간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하동에 와서 살다 보니 자고 일어나면 아랫집 감나무가 초록초록 했고, 자고 일어나면 길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기도 했다.
해가 있어야 싹이 튼다고 생각하지만 어둠 속에서야말로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난다는 것, 이것은 정말 위대한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밤에 자랐고, 고통 중에 성숙했고, 아프고 나서야 키가 반 뼘즘 자란 것일까.
 
 
우주의 힘은 수줍다. 우주는 힘이 잔뜩 들어간 사람, 눈 부릅뜬 사람은 비켜 다닌다. 알지 않는가. 모든 스포츠도 결국은 힘을 빼면 고수가 된다. 삶도 그렇다. 밤이란 건, 하늘이 ‘좀 가만히 있을래? 넌 좀 자. 눈 감고 가만히 있어봐. 내가 그대로 치유해 줄게. 제발 네 힘 좀 빼봐’라고 속삭이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이루어졌고 밤이 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박탈과 고통의 삶을 살기로 결심해서는 안 됩니다. 탄탄하고 오래 지속되는 참된 사랑은 자기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향해 가려고, 종종 우리 자신을 가두는 고리를 깨뜨릴 때, 인생은 흥미진진해집니다.
 
 
나는 이제 사랑이 희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만 사랑의 한 부분이 희생이고, 희생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하는 것, 엄마가 아기에게, 어깨가 넓은 청년이 철로 위에 쓰러진 노파에게, 용광로 같은 심장을 지닌 자가 식민지가 된 가여운 조국에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가장 어린 누이에게 오빠의 밥을 해주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버지 성질이 저러니 네가 참아라”도 사랑이 아닌 것을 알며, “너만 입 다물면 우리 가족이 평화롭다”는 학대이며, 남편이 할 일, 자녀가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진다는 십자가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도 안다. 이웃을 위해, 남을 위해 나를 나누고 도와주는 삶을 산다는 것과 희생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인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 택한다. 고립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을 닫아걸고 자발적으로 자신을 고립시킨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절벽 같던 외로움은 창작에의 벼랑길로 변한다. 그녀가 그것을 당하지 않고 택했기 때문이다. 당하면 외로움이고 택하면 고독 아니던가.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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