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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어떤 어른 : 좋은 어른이 필요했던 누군가에게 추천하는 책.

by 심토리지 2025.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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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연하게 무르익은 어른이 된 지금,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것이 장래(?) 희망이고, 어떻게 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 종종 고민한다. 특히나, 조카가 태어난 이후에는 그 마음이 조금 더 간절해졌는데 그 때 김소영 작가님의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을 읽으며 여러가지 다짐들을 했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짐이 조금은 흐려졌을 무렵, 서점에서 4년만에 출간한 작가님의 신작 '어떤 어른'이라는 책을 발견하고서는 집중해 읽고 문장들을 되새기며 조금은 무너졌던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돌아보면 예민하고 불안함이 많았던 어린 시절부터 사회생활 초년차를 지나는 무렵까지 난 늘 기댈 수 있는 어른, 좋은 사수를 갈망했었다. 그리고 그런 어른이 곁에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어느 덧 완연한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작가님의 시선으로 책을 읽어 내려가며 나 자신과 삶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특히, 좋은 어른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나에게 아래 문장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다짐하게 해주는 듯 했다. 

'여러분이 어렸을 때 좋아했던 어른이 되어주세요. 만일 그런 어른을 만난 적이 없다면, 여러분에게 필요했던 바로 그 어른이 되어주세요.'  

이 세상에 좋은 어른이 더 많아진다면, 그 어른을 보며 자라난 어린이는
또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지금보다 우리는 

나아진 미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나 또한 좋은 어른이 꼭 되어야 겠다.

 


 

 

나에게 없는 것을 어린이에게 줄 수 없으니, 나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나도 어른을 찾게 된다. (7P)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말하기’가 아닌 ‘듣기’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38P)

 

 

말수가 적은 어린이는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오해도 종종 받는다. 그런데 자신을 꼭 말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이나 연주도 표현의 도구가 된다. 어떤 어린이는 무언가가 표현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평소에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어린이가 잠자리에 들면서 낮에 본 책 얘기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 어린이가 하루 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40P)

 

 

어린이가 말하지 않는 동안에도 어떤 느낌이나 아이디어는 어린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41P)

 

 

나 자신이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좋은 말하기가 말수에 달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수 적은 나의 ‘어른’ 친구들이 그 증거다. 나는 그들이 내 말을 들어주는 것만큼이나 그 ‘적은 말’을 내게 들려주는 것이 늘 고맙다. 솔직히 말수 적은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늘 실패한다. 그런 것은 타고나는 모양이다. 대신 이따금 그 친구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조용한 어린이였겠지. 오해를 받아 속상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괜찮았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익숙한 고요함 속에서 자기를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되었겠지. 그러니까 말수가 적은 어린이도 괜찮을 것이다. (42P)

 

 

어렸을 때 그토록 친구 관계에 안달복달했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정말 초등학교 때 친구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라고 묻는 어린이에게 해줄 말을 찾다가 깨달았다. 만일 내가 어렸을 때 그런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친구 때문에 애태우고 즐거워하고 실망하고 감동받고 천천히 잊어가고 추억해본 경험이 없다면, 나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내가 지금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오늘의 내 친구들은 어렸을 때 친구들이 만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52P)

 

 

어린이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내가 제일 많이 웃었던 것은 이것이다.

“잘 생각해봐.”

수학 문제를 틀렸는데 왜 틀렸는지 몰라서 물어봤을 때, 책 읽다가 어려운 낱말이 나와서 물어봤을 때, 이유를 모르고 혼날 때, 어른들이 잘 생각해봐.”라고 하면 속상하고 솔직히 ‘어이가 없다’고 했다. 어린이들이 글감이 안 떠오른다거나, 이다음에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할 때 가끔 쓰던 말이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나로서는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주려고 말한 건데 당시에 누군가는 싫어했겠구나.

어린이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몰라서 틀렸는데, 생각해봐도 모르겠는데, 자꾸 잘 생각해보라고 하니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생각은 어차피 ‘스스로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말을 들은 후로 나는 질문을 바꾸었다.

"만약에 아무렇게나 쓴다면 뭐라고 쓸 거야?”

“어디까지 떠올려봤어? 이상하게라도 말해봐. 그럼 선생님이 말이 되게 도와줄게.” (71P)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창의적인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전의 것들을 배워야 한다. 비윤리적이거나 사회적 합의에 어긋나는 것을 창의성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표현의 기술을 익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한 번, 창작은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84P)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 그것이 문화 예술이 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 예술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코로나19 시대에 개인적인 기회로 전시회나 공연장을 찾고 예술 교육을 받은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학교 수업을 제외한 일체의 활동으로부터 소외된 어린이들도 있었다. 문화 예술 교육은 시민 교육이다. 공공성을 강화하지 않으면 계층 간의 격차 뿐 아니라 세대 안에서의 이해와 소통에도 큰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85P)

 

 

어린이들은 조심성이 없다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면 조심성이 없다기보다는 서툴러서 실수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어떤 일에 서투르면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를 낼 수 있다. 초보 운전자들이 조심성이 없어서 사고를 내는 게 아닌 것처럼. 어린이는 실선을 따라 신중하게 가위질을 하면서 겹쳐 있던 종이까지 자르고, 그렇게 긴장하고 걷는데도 식판의 국을 흘리고, 비 오는 날 물 웅덩이를 살피느라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힌다. 어른들에게는 ‘조금만 조심하면’ 될 일이 어린이에게는 경험과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라는 것이 날마다 어린이가 하는 일이다. (89P)

 

 

‘앞으로 점점 더 잘하게 된다’는 확신은 어린이가 자신을 성장시키는 큰 동력이다. 그런 확신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현재의 자기 모습이다. 재작년보다 작년, 작년보다 지금 더 그림을 잘 그리고, 축구를 잘하고, 아는 게 많다.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잘하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열심히 공을 차고 공부도 한다. 그러고 보면 서툴다는 것도 어른들 생각이지, 어린이 입장에서는 연습을 거듭한 ‘지금’이 가장 잘하는 때다. (91P)

 

 

세계 곳곳에 어린이가 산다. 어른의 세계와 어린이의 세계는 늘 겹치게 마련이다. 나의 세계에 어린이가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어린이한테 모범적인 ‘사람’이 되자고 또 다짐한다. (105P)

 

 

어린이 가까이에서는 못 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도서관의 일반 자료실 문 앞에 붙은 ‘어린이는 어린이 자료실을 이용하라’는 안내가 눈에 띄었다. 어린이 자료실에는 ‘어른은 일반 자료실을 이용하라’는 안내서가 없는데, ‘어린이 자료실’은 어린이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어린이의 공간을 제한하려고 만든 게 아니다. 어린이가 찾고 싶은 책이 일반 자료실에 있을 수도 있고, 어린이도 나처럼 이 책 저 책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을 수 있다. 설마 어린이가 일반 자료실에 들어가려고 할 때 실제로 막아서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 안내문을 보는 어린이의 마음은 어떨까? 공공시설에서 되도록 안 오기를 바라는 이용자가 되는 것은 분명 좋은 경험은 아닐 것이다. (119P)

 

 

어린이는 우리가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미래의 사람이다. 오늘의 어린이는 우리가 어릴 때 막연히 떠올렸던 그 미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123P)

 

 

여러분이 어렸을 때 좋아했던 어른이 되어주세요. 만일 그런 어른을 만난 적이 없다면, 여러분에게 필요했던 바로 그 어른이 되어주세요. (132P)

 

 

잘 적응한다고 해서 힘이 들지 않는 게 아니다. 어른도 괜찮아 보이려고 무리할 때가 있다. 어린이는 더 자주 그런다. 얼마큼 감당할 수 있는지 자기도 잘 모르니까. (139P)

 

 

읽는 사람들은 읽는 세계 안에서 서로 알고 지낸다. 정치가 책을 미워하고 사회가 책을 소외시키고 경제가 책을 의심해도, 독자는 계속 생겨난다. 브레히트는 “암울한 시대에도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래도 노래 부를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대해”라고 했다. 우리는 계속 읽을 것이다. 우리 세계에 대한 책을. (151P)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선생님은 날마다 ‘가까이에서 보는 의미 있는 어른’이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위상은 어쩌다 마주친 작가와는 전혀 다르고, 소방관이나 과학자와도 다르다. 그러니 선생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사회를 위해서 그분들에게 안정과 인정이 필요하다. (161P)

 

 

학교는 공교육을 실행하는 기관이다. 이때의 ‘공公’은 공평하다는 뜻의 공이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공평하게 배우고 이해받고 보호받는 곳이다. 입시나 진로 준비만 하는 곳이 아니라 하루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바깥의 집’이다. 누군가의 자녀, 어느 집의 몇째가 아니라 이름을 가지고 한 명의 시민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은 사적인 생활을 가꾸어나간다. 『공공성』이라는 책에서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소멸을 요구하지 않는다”라는 설명을 읽으면서 공과 사가 얼마나 얽혀 있는 관념인지 생각했다. 공과 사를 구분할 생각만 했지, 어떻게 합쳐지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170P)

 

 

중학생이 되는 열네 살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열아홉 살까지, 청소년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마음에는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는 것 같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과도기’이니 웬만한 고민은 어른이 된 뒤로 미루었으면 한다. 다르게 말하면, 어른이 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매달리는 게 답답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그렇지 않다. ‘사춘기’ 청소년기’가 아니라 하루하루 오늘을 살아간다. 어른이 된 뒤보다 내일이 더 걱정이다. (179P)

 

 

나는 시민으로서 책임감 있게 배워가야 한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은 책임을 나누고 측정하지 않으면서 모두가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라고 했다.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회 구조를 만들기 위해 남들과 함께해야만 한다고도 했다. 생각해보면 책임을 다해야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당연하다. 나는 나대로 계속해서 배우고, 알려줄 수 있는 이들에게 알릴 책임이 있다 (213P)

 

 

‘노키즈존’이라는말을 사용하기 전에도 우리는 어린이와 함께 잘 사 먹고 잘 놀고 잘 구경했다. 사회의 면면이 달라져 제재가 필요해지더라도,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않으면 좋겠다. 어린이의 출입을 제한해야 할 때는 오직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때 뿐이다.

(268P)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나는 어렸을 때 이랬다’는 기억을 근거로 ‘어린이는 이렇다’ 또는 ‘어린이는 이래야 한다’는 정의가 내려지는 식이다. 그렇게 각자 착한, 활달한, 얌전한, 공부 잘하는, 어른 말씀을 잘 듣는 어린이를 떠올리고 주변의 어린이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한다. 어린이가 기대와 다르면 실망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나는 어렸을 때 식당에서 안 울었는데 저 아이는 왜 울지?’하는 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어린이는 자기 자신, 딱 한 명이다. 그것도 자의적으로 정리된 기억이다. 그것만으로 어린이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린이를 이해하려면 눈앞의 어린이를 보아야 한다. (285P)

 

 

동심에 대한 오해는 결국 어린이를 어른의 세계와 떼어놓는다. 어린이가 옳은 마음이나 천진한 낙관을 보여줄 때 단지 어려서, 순진해서, 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심은 찬미되는 만큼이나 무지하고 현실 감각이 없는 것,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될 때가 많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잃어버려야 성숙해지는 무언가로.

(292P)

 

 

곰곰이 따져보니 우리 몸과 마음은 성장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몸의 성장은 자연의 일이고 나이와 상관이 있다. 일정한 방향이 있고 어느 순간 멈추며 그 다음에는 소멸을 향해 간다. 마음은 그렇지 않다. 몸과 달리 자랐다가 뒷걸음치기도 한다. 정체기를 겪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갑자기 도약하기도 한다. 사람마다 성장을 맞이하는 시기도 모습도 다르다. 그러니 어린이의 마음이라고 해서 꼭 어른보다 미숙한 것은 아니다.

(293P)

 

 

어린이한테 어른은 절대적인 존재다. 어린이가 먹고 입고 자는 문제는 전적으로 어른 손에 달렸다. 물질적인 면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도 그렇다. 어린이는 어른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배운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운다. 어린이는 모르는게 있으면 어른한테 물어본다. 어린이끼리 해결되지 않는 갈등을 어른이 중재한다. 잘잘못을 따지고 화해시키거나 떼어놓는다. 훈육하고 위로한다.

정확하게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어린이들은 대체로 어른들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어른의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돌보고 책임지는 권위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모습이 어린이가 어른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어른에게 기대어 있는 장면으로 보인다. 나는 어린이니까 어린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옳다 내가 먼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어른 뒤에 숨지 말고, 그분들한테 기대어서. (303-304P)

 

 

거절당하거나, 무안해지거나, 때로는 후회할 각오까지도 해야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저분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아닌지 판단도 잘해야 하고, 나서는 순간도 잘 잡아야 한다. 어디까지 돕고 퇴장할지도. (322P)

 

 

날마다 보는 험악한 뉴스만큼, 험악한 뉴스에 무감해지는 나 자신에게 겁이 난다. 그럴 때 친절해지기로 한 번 더 마음을 다진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주려면 상황 파악도 잘 해야 되고, 용기도 내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게 ‘친절함’이라면 나는 그에 걸맞은 판단력도, 용기도 갖고 있을 테니까.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용감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게 나의 장래희망이다. (3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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